프랑스혁명과 루이 16세 처형

프랑스 지롱드파와 산악파의 대립은 특히 국왕의 재판문제를 둘러싸고 치열하였다.

지롱드파는 국왕을 변호하여 그의 정치적 책임의 해제를 요구하였으나, 투표에서 패하여 마침내 산악파의 주도하에 국왕은 1793년 1월 국가에 대한 음모죄로 기요틴(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왕의 죽음은 지롱드파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혁명하의 프랑스에도 용이치 않은 사태를 불러일으켰다. 그 이유는 영국 ·네덜란드 ·에스파냐 ·나폴리 ·로마교황 등이 왕의 처형 사실을 알고 잇따라 참전하여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와 함께 대(對)프랑스 동맹을 결성하였기때문이다. 그 위에 방데현(縣) 등 서부 후진지대에서는 왕당파의 반란까지 발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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