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아편전쟁(第一次鴉片戰爭)(1839년 9월 4일 ~ 1842년 8월 29일) 은 청나라의 아편 단속을 빌미로 한 영국의 침략전쟁이다. 항각 상인이 클리퍼를 타고 광둥 연안에서 무장한 채, 아편을 공개적으로 판매함으로 인하여 발발한 전쟁이다. 전쟁의 직접적인 도화선은 1839년 청나라 흠차대신 임칙서가 도광제(재위 1820~50년)의 교지를 받들어, 광둥 동관에서 아편을 몰수한 것에서 비롯한다.1839년 11월 3일 파견한 원정군이 마카오에 도착하면서 무장충돌이 시작되었다. 임칙서의 무역 거부 응답을 구실로 영국은 전쟁을 시작하고, 청국 함대를 궤멸시켰다. 1840년 6월에 본격화되었다.

1840년 11월 청군은 영국군에 대패하였고, 영국군은 다구 지역까지 북상하여 직예 지역 총독 기선과 협상하였고, 다시 남하해 촨비 지역에서 조약 체결을 강요하며 홍콩을 강점했다. 궁지에 몰린 청나라 조정에서는 임칙서를 면직시키고 협상을 기선에게 맡겼지만, 홍콩 할양을 받아 들일 수는 없었다. 조약 비준을 준수하지도 않고, 영국군이 홍콩을 '영국 영토'라고 선포하자, 청나라 조정에서는 기선을 파직시키고 험형에 처하였고 다시 전쟁에 돌입하게 된다.

1841년 1월 7일 후먼 전투에서 관천배가 분전을 하였지만, 영국이 제해권을 장악하였다. 그해 5월, 광저우에 상륙한 영국군은 약탈과 폭행 사건을 일으켜 민중들의 분노를 샀다. 민중들이 봉기하여 영국군을 막아섰고 영국군은 전멸 위기에 처하지만, 청나라 정부에 포위 해제를 요구해 탈출에 성공하게 되는 삼원리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1842년 8월 29일 영국군은 광저우를 포위해 조약을 맺고 전쟁은 종결되고, 영국은 배상금 600만 달러를 받고 철수했다. 그러나, 새로 전권을 위임받은 대표가 도착하면서 영국군은 양쯔강 요충지를 차례로 함락시켜 청으로 하여금 《난징 조약》을 체결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냈다.

해설 더 보기: ko.m.wikipedia.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