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정치가·저술가·웅변가.

1940~45년과 1951~55년 총리를 역임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중에 위대한 국가지도자로 활약했다. 그는 2개월 먼저 태어난 조산아였다. 그가 태어난 블렌엄 궁은 존 처칠(말버러 공작 1세, 1650~1722)이 스페인 계승전쟁에서 세운 전공(戰功)으로 나라에서 하사받은 것이었다. 그의 부친 랜돌프 처칠 경(1849~95)은 뛰어난 보수당 정치가로서 재무장관 및 하원의 보수당 당수를 역임한 인물로 그에게는 항상 화제가 많았다. 어머니 제니 제롬은 미국인으로서 뉴욕의 은행가이며, 한때〈뉴욕 타임스 New York Times〉의 대주주였고, 아메리칸 재킷 클럽을 창립한 경마 애호가 레너드 월터 제롬(1817~1891)의 딸이었다.

1924년 11월 선거 후 보수당의 당수 볼드윈은 처칠을 재무장관으로 임명했다. 재정문제에 있어서 그는 엄격한 정통주의를 고수했다. 처칠이 영국의 파운드 화(貨)를 금본위제로 복귀시키자 경제학자 케인스는 처칠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금본위제로의 복귀정책은 디플레이션, 실업, 광부의 파업, 1926년의 총파업 등을 야기했다. 처칠은 이 총파업이 국민을 인질로 하여 몸값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에 대해 강경한 조치를 취할 것을 주장했다. 파업이 절정에 이르고 런던의 거의 모든 신문사가 폐쇄되자, 정부의 견해를 강하게 시사하는〈영국 관보 British Gazette〉의 간행을 자신이 직접 조직하고 지도했다. 1929년 6월 보수당 정부가 무너졌을 때 처칠은 노동당 소수 정부와 협력하려는 보수당 당수 볼드윈에게 반대했다. 처칠과 볼드윈의 관계는 특히 처칠이 인도에 자치령의 지위를 승인하자는 볼드윈의 제안을 비난했을 때 더욱 악화되었다. 처칠은 예비내각에서 사임했으며, 열정적으로 때로는 신경질적으로 인도통치법에 반대했다. 1930년대에 처칠은 의석은 보유하고 있었으나 내각에서는 제외되어 있었다. 그는 자유당과 보수당으로부터 지나치게 독립심이 강하여 당규율을 받아들이기 힘든 인물로 간주되었고, 큰 불신을 사고 있었다. 그러나 저술가로서는 성공하여 많은 수익을 올렸는데, 주목할 만한 저서로〈나의 반생 My Early Life〉(1930)과 4권의〈말버러:그 생애와 시대 Marlborough:His Life and Times〉(1933~38)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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