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체파로 유명한 스페인 화가이자 조각가, 시인, 극작가는?
피카소
에스파냐의 화가. 남 에스파냐 말라가 출생. 아버지는 회화(繪畵) 교사였다. 어려서부터 그림에 뛰어난 재능을 가졌으며 1896년 마드리드 왕립(王立) 아카데미 상급(上級) 반에 입학, 1900년 파리에서 제1회 개인전(個人展)을 가졌다. 그는 신비주의(神秘主義)적 우수(憂愁)가 깃들인 화풍(畵風)을 섭취(攝取)하여 이른바 푸른 시대의 양식을 창시(創始)했다. 1905년 네덜란드에 여행(旅行)하고 짧은 기간 도색(桃色)의 시대가 계속되고, 1906년 흑인 조각(黑人彫刻)으로부터 착상을 얻고 입체파(立體派)의 선구를 이루고 있는 《아비뇽의 딸들》을 발표, 다시 《자화상》ㆍ《황색의 코루사지》ㆍ《흑인의 춤추는 소녀》등, 동 경향의 작품을 그렸다.
1910~14는 분해적(分解的) 입체파(立體派)의 시대, 그 이후 종합적 입체파(綜合的立體派)의 시대가 되었다. 1915년부터는 안다루 풍의 사실적(事實的) 그림을 그렸다. 1819년 이탈리아에 여행, 러시아 발레를 위하여 무대(舞台) 장치ㆍ의상 도안 등을 담당하였다. 1919년경부터 신고전주의(新古典主義)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1924년경부터는 사실(事實)주의와 입체파(立體派)의 혼합된 작품을 만들고 그 기간에 《3의 얼굴》ㆍ《3인의 음악가》등 입체파의 저명한 작품을 발표했다. 1924년 《조롱(鳥籠)》을 발표, 당시 대두되기 시작한 초현실주의(超現實主義)의 요소를 받아들여 입체파와 초현실주의의 절충 양식의 그림을 그렸다. 에스파냐의 내란에 영향을 받아 파시즘에 대한 분노와 조국애로 일관된 걸작 《게르니카(1937)》을 발표하였다.
1939년 남불(南佛)에 체제하면서, 대작(大作) 《안티브의 야밤 낚시질》을 제작했다. 제2차 대전 중에는 독일군 점령 하의 파리에 체재하면서, 나치스에 대한 분격과 반항을 제작하는 작품 속에 담고 있었다. 19세기부터 20세기에 걸쳐서, 미술의 표현 양식의 혁명시대에 최대의 역할을 완수했으며, 1907년 브라크(G. Braque)와 더불어 입체파 운동을 시작한 이래, 전세계의 예술계에 미친 영향은 절대적이다. 회화ㆍ조각ㆍ석판(石版)ㆍ도기(陶器) 등 모든 미술의 영역에서 활약했으며, 그의 조형적(造形的)인 의욕은 참으로 경탄할 만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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