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2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난 그녀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으로 건너가 10세 때 영화 ‘귀로(歸路)’로 데뷔한 그녀(사진에서 B)는 빼어난 용모로 ‘세기의 미인’이라는 찬사를 한몸에 받았다.

이 ‘세기의 미인’의 첫 남자는 호텔왕 힐튼의 아들인 콘래드 힐튼 주니어(Hilton·사진에서 1번)이었다. 1950년 17세의 나이로 ‘호텔왕’과 결혼한 테일러는 그러나 2년 만에 이혼했고, 1952년 같은 영국 출신인 영화배우 마이클 윌딩(2번)과 2번째로 결혼했다. 그녀는 윌딩과 5년간 결혼 생활을 지속했다. 그와의 결혼생활에서 2명의 아들도 얻었다. 그러나 테일러는 영화제작자 마이클 토드(3번)에 반했고 1957년 3번째 결혼을 감행했다.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을 정도로 재능이 넘쳤던 토드는 그러나 ‘엘리자베스의 남자’로 더 유명해졌지만, 결혼생활은 1년 남짓 정도였다. 그는 1957년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

3번의 결혼과 이혼을 거쳤지만, 1959년 당시 테일러는 고작 27세였다. 그런 그녀 앞에 나타난 것이 팝가수 에디 피셔(4번).

피셔와 테일러의 결혼은 그러나 테일러가 리처드 버튼(5번)과 로마에서의 영화 촬영 기간에 사랑에 빠지면서 5년 만에 파탄 났고 피셔는 이후 재기하지 못했다. 1975년 당대의 최고 배우 리처드 버튼과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세기의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나 테일러의 5번째는 결혼은 순탄치 못했다. 알코올 중독자였던 버튼은 술 때문에 테일러와 다툼이 잦았다. 결혼 8년째 두 사람의 갈등이 외부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들은 1974년 공식적으로 결별을 선언했다. 둘은 파경 1년 만에 다시 결혼했지만 4개월 만에 다시 갈라섰다.

이후 테일러는 이란이 왕정일 당시에 주미 이란 대사인 아르데시 자헤디(사진에서 A)와 뜨거운 관계에 빠졌다. 아예 “뜨거운 커플(the hottest couple)”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이란 왕 레자 팔레비가 자헤디에게 테일러와의 관계를 끝내도록 종용했고, 그렇게 됐다.

그녀의 6번째 남편이자 7번째 결혼 상대자는 존 윌리엄 워너. 1976년에 결혼한 워너는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남편이라는 후광을 입고 첫 상원의원 선거를 1978년에 성공적으로 치렀고, 이후 모두 5선의 의원이 됐다. 하지만 둘은 1982년 이혼했다. 테일러의 생애 마지막이자 7번째 남편인 래리 포텐스키는 건설 노동자였다.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포텐스키는 1991년 팝 가수 마이클 잭슨의 원더랜드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둘은 1996년 10월 이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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