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소련 대숙청의 시작은 누구의 죽음으로 촉발된 것인가?
스탈린에게는, 오늘날 우리가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위대한 전쟁(그것도 대조국전쟁!)을 승리로 이끈 위대한 지도자의 이미지가 있었다. 더 정확히는, 최소한 그런 이미지가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당시의 문서와 영상 기록물들은 살펴보면 스탈린에 대한 소련 국민들의 지지는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높았던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스탈린은 소련이라는 거대한 극장을 운영한 감독이자 연출가였다.
그러나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절대적인 사실이 있다. 스탈린은 독재자였고, 또 학살자였다는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이른바 '대숙청'에 의해 증명된다. 대숙청의 시작은 세르게이 키로프(Sergei M. Kirov)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는 1934년 당시 레닌그라드(오늘날 상트 페테르부르크)시의 공산당 제1 당서기로, 대중적인 인기와 지명도가 나날이 높아지던 차세대 리더였다. 어느 날 스탈린은 키로프를 모스크바의 식사 자리에 초대했다. 스탈린은 그와 즐겁게 식사를 했으며, 소문에 따르면 '키로프 당신이 소련을 이끌 차기 리더'라는 암시도 강하게 주었다고 알려져 있다. 스탈린은 키로프를 레닌그라드로 가는 기차역까지 배웅해주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키로프는 며칠 후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겉으로는 좌파 성향 청년 당원들에게 암살당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그 배후가 스탈린이라는 점은 모두가 짐작한 바다.
카메네프, 지노비예프, 부하린 등도 곧 숙청의 대상이 되었다. 이들은 레닌 사후 스탈린과 권력 투쟁을 하던 경쟁자들이었다. 죄목은 테러 모의였다. 그러나 실제 그들은 소련의 성공을 누구보다 바라던 이들이었음이 분명하다. 이들은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영웅이었으며, 혁명 후에도 소련의 공업화와 농업화 정책을 성공적으로 이끈 지도자 그룹이었다. 유일하게 살아남았던 스탈린의 경쟁자는 트로츠키였는데, 그는 멕시코로 망명해 있었기에 당시의 화를 피할 수 있었다(그도 결국에는 1940년 스탈린이 보낸 자객에 의해 암살된다).
1934년 12월 키로프 암살 이후 스탈린의 피의 숙청을 계속됐으며, 특히 1936년부터 1938년 사이에 숙청은 극에 달했다. 이 당시 숙청을 '최전방'에서 실행했던 조직은 체카(Cheka)의 후신이자 KGB의 전신인 내무인민위원회(NKVD)였다. 내무인민위원회는 무자비하게 숙청을 단행하였는데, 심지어 내무인민위원회의 조직원들도 숙청의 대상이 되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당시 내무인민위원회를 이끌었던 야고다와 예조프다. 스탈린 입장에서는 그들이 숙청의 비밀과 성격을 너무나 자세히 알고 있었기에 '적당한 때'에 그들의 입을 영원히 닫아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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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huffingtonpos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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