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후기인상파 화가 폴 고갱 하면 떠오르는 지명은 으레 남태평양의 타히티섬이다. ‘혁명의 해’(1848년)에 ‘혁명의 도시’(파리)에서 태어난 팔자였을까, 사회주의 성향의 외할아버지 핏줄 탓이었을까, 아니면 저널리스트 아버지를 빼닮은 호기심의 발로였을까. 원주민의 건강미와 날것 그대로의 열대 자연환경에서 유토피아를 꿈꿨던 그의 타히티 생활은 강렬한 색채의 작품 속에 영원히 박제돼 후세에 전해진다.

가난뱅이 화가, 건설노동자로 두달살이

“문명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고자 고요하고 평화로운 세상을 찾아 떠난다”던 고갱의 일생에서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은 한 토막이 중남미 파나마에서 보낸 짧은 시간이다. 1887년 그의 나이 39살 때다. 다섯 명의 자녀를 뒀으나, 손에 쥔 것이라곤 없는 무일푼 가난뱅이였고 창작 활동마저 여의치 않던 불우한 시절이다.

가족을 남겨두고 홀몸으로 떠나온 가난한 화가를 기다린 곳은 이국적 풍토 가득한 작업실이 아니었다. 그가 짐을 부린 곳은 거친 열대 밀림을 뚫고 길을 내던 미약한 인간들의 처절한 싸움터, 바로 파나마운하 건설 공사판. 자연이 갈라놓은 두 대양(대서양과 태평양)을 인간이 하나의 뱃길로 잇는, 숙명에 정면으로 맞선 노동이었다. 이곳에서 고갱은 화가가 아닌 건설노동자의 삶을 하루하루 버텨냈다.

고통은 말이 아니었다. 풍토병인 황열병과 말라리아에 시달리다보니 건강은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졌다. 이 무렵 그가 파리에 남겨진 아내에게 띄운 편지엔 이런 구절이 있었다. “아침 5시30분부터 저녁 6시까지 열대의 태양 아래, 또는 빗속에서 땅을 파야 했소. 밤이면 모기들한테 뜯겨 먹혔지.” 결국 고갱은 두 달을 버티지 못하고 미련 없이 희망의 땅 파나마를 등졌다. 쉴 새 없이 몰려들고 쉴 새 없이 짐을 싸는 막노동 잡부들의 행렬. 파나마운하 건설의 역사가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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