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7년 나치는 바이마르 교외에 강제 수용소를 세우고 매우 완곡한 '부헨발트'(너도밤나무 숲)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곳에는 정치범, 유태인, 집시는 물론 노르웨이 대학생들까지 수용되어 있었으며, 1944년에는 영국과 미국의 항공병 한 무리가 갇혀 있었다. 거의 25만 명 가까운 죄수들이 이 수용소를 거쳐 갔으며, 그중에서 적어도 5만 6천 명은 갇힌 상태로 목숨을 잃었다. 소의 첫 번째 책임자인 카를 코흐와 그의 아내 일세는 잔혹함으로 악명이 높았는데, 특히 충동적으로 죄수들을 죽이곤 했다. 일세 코흐는 희생자들의 가죽을 벗기는 취미가 있어, 그것으로 책 커버나 전등갓 같은 가정용품을 만들곤 했다. 부헨발트는 또한 '의학' 실험이 자행되던 장소로, 다양한 백신을 실험해 보기 위해 소련군 포로들에게 발진티푸스 균을 주입했다. 수많은 죄수들은 굶어 죽거나 죽을 때까지 근처 채석장에서 노동을 하거나, 동쪽의 죽음의 수용소로 보내져 몰살당했다. 1945년 4월, 연합군이 부헨발트로 진격해 들어오기 시작했으며, 간수들은 재소자들이 수용소를 장악하도록 놓아둔 채 달아났다. 4월 11일, 미군이 수용소의 통제를 맡았으나, 수용소가 이제는 독일의 소련 점령 지역에 속하게 되었기 때문에 지배권은 붉은 군대에게 넘어갔다. '캠프 넘버 2'라고 개명된 부헨발트는 1945년에서 1950년 사이에 독일 죄수들을 수감했으며, 이 중 7천 명이 죽었다. 1950년 수용소가 문을 닫았을 때 대부분의 건물은 파괴되었으나, 콘크리트로 된 감시탑 같은 몇 채의 건물은 남았다. 수용소 해방 이후 임시 기념비가 세워졌는데, 이는 1958년 석조 기념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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