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사르는 2년전 폼페이우스와의 결전을 벌였던 파루살루스 전투(Battle of Pharsalus)에서 승리한후 가문의 신 베누스에게 영광을 돌리고 신전을 지어주겠다고 공언했다. 신전은 카이사르의 지시로 건축되었다. 신전에는 베누스 여신은 물론 카이사르와 이집트 클레오파트라 여왕도 조각되어 있었다.

그리스에서 벌어진 파르살루스 전투는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 군을 괴멸시키고, 로마 주도권을 장악한 전투였다.

개선식 2년전인 BC 48년 8월 9일, 그리스 테살리아 지방의 파르살루스 평원에 카이사르 군대와 폼페이우스파 군대가 대치했다. 병력은 폼페이우스가 절대적으로 우세했다. 품페이우스에겐 중무장 보병 4만7,000명, 기병 7,000명이 가담했고, 카이사르 진영은 중무장 보병 2만2,000명, 기병 1,000명에 불과했다. 보병 수로는 2대1, 기병 수로는 7대1이었다. 고대 전투는 기병이 좌우했기 때문에 카이사르는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카이사르군에겐 군선이 부족해 병참이 끊어지고 식량 조달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카이사르 군대는 고참병으로 불리는 베테랑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카이사르와 함께 수년간 갈리아 전투에 참여해 전투경력이 붙은 병사들이었다.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인이야기 5권에서 이렇게 썼다. (p206)

"12년 전인 기원전 60년. 당시 46세였던 폼페이우스와 40세인 카이사르는 ‘삼두정치’를 결성한 동지였다. 이듬해인 기원전 59년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의 딸 율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그리고 그 이듬해에 카이사르는 수도 로마를 폼페이우스에게 맡기고 갈리아로 떠났다. 갈리아로 떠나기 전에 써둔 카이사르의 유언장은 사위인 폼페이우스를 상속인으로 지정했다.

그러나 동지관계를 맺은지 7년이 지날 무렵부터 폼페이우스는 카이스르와 멀어졌고, 결국에는 반카이사르파의 등에 업혀 과거의 동지와 적대하는 사이가 된다.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너자, 폼페이우스는 이탈리아를 탈출했고, 파르살로스 회전에서 참패한 뒤 이집트로 도망쳤다가 목숨을 잃었다. 이 것이 여섯 살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로마 최고의 두 장군이 마지막 2년간 겪은 운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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