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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중 로마 시대의 위대한 연설가로 알려진 인물은?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 기원전 106년 1월 3일 - 기원전 43년 12월 7일)는 로마시대의 정치가, 웅변가, 문학가, 철학자이다. 키케로는 아들의 출세를 갈망하는 아버지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일찍 로마로 유학하여 관료가 되기 위한 수사학, 웅변술을 스카이볼라 밑에서 익혔다. 26세에 아버지 살인 혐의로 고소된 로스키우스를 성공적으로 변호함으로써 로마의 정계에 알려진다. 기원전 75년 31세의 나이로 재무관에 선출된다. 5년 뒤 안찰관에 선출되어 재임 기간 동안 유명한 베레스 반박문을 쓰고, 기원전 66년 법무관에 선출되어 당시 정계의 실권자 폼페이우스를 지지하는 변론을 쓴다. 기원전 49년 폼페이우스와 율리우스 카이사르 사이에 벌어진 로마 공화정의 내전에서 키케로는 어느 편에 가담할 것인가 하는 갈등 끝에 결국 원로원파인 폼페이우스 진영에 가담한다. 기원전 48년 8월 9일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폼페이우스가 카이사르에게 패배함으로써 내전이 끝나자 키케로의 운명은 카이사르의 말 한마디에 달리게 된다. 카이사르는 로마로 입성한 후 키케로를 사면해 주면서 심지어 로마를 위해 계속 정치 활동을 해 줄 것을 권고한다. 그러나 점점 눈에 드러나 보이는 일인 독재 정치에 무력감과 회의를 느끼면서 주로 철학을 주제로 한 책을 쓰는 데 시간을 보낸다. 기원전 44년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 키케로는 공화정을 되살리고자 하는 작은 희망으로 특히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탄핵하는 필리피카이(philippicae)를 발표하여 일인 독재와 폭력 정치를 규탄한다. 기원전 43년 12월 7일 모든 희망을 버리고 로마를 피신하던 키케로는 제2차 삼두정치에 의해 살생부 명단에 올라가게 되고, 그 뒤 안토니우스의 사주를 받은 부하에 의해 카이에타에서 암살당했다. 키케로는 머리와 두 손이 잘려 죽었는데, 안토니우스는 키케로의 머리와 두 손을 로마 광장에 내다 걸었다. 공화주의 신념을 잃지 않고, 글로써 안토니우스를 규탄한 키케로를 두려워했던 것이다.
해설 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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