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데미라고도 알려진 고대 그리스 학교를 세운 사람은?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명문 가정에서 태어난 철학자로, 소크라테스의 제자이기도 하다. 젊었을 때 소크라테스에게 배우고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는데, 그의 저서는 모두 소크라테스가 주인공으로 된 변증론에 의한 대화편이어서 그와 스승과의 학설을 구별하기 어렵다. 스승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곁에서 지켜본 플라톤은 큰 충격을 받고 정치가가 되고자 한 꿈을 접는다. 그 후 키레네학파와 피타고라스학파의 영향을 받아 이데아와 변증법, 실천적 정신의 깨달음을 얻게 된다. 그의 학설의 핵심은 이데아론인데, 여기서 이데아란 현실의 불완전한 것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최선최미(最善最美)한 진실의 존재로서, 개인이나 국가가 선한 생활을 하기 위해 알아야만 하는 것이었다.
이 이데아의 인식으로 인간을 향하게 하는 힘이 에로스이며, 인식하도록 하는 방법이 문답법이다. 플라톤은 이탈리아를 여행하는 동안 <소크라테스의 변론>, <라케스> 등의 글을 썼고, 귀국한 후에는 <대(大) 히피아스>, <소(小) 히피아스>를 썼다. 플라톤이 평소 꿈꾸던 이상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친구 디온과 함께 시켈리아의 참주 디오뉘시오스를 방문하게 되는데, 그 자리에서 그의 독재 정치 체제를 비난하다 노예로 전락하게 된다. 노예의 신분에서 벗어난 뒤 아카데메이아 학원을 세워 후대 양성에 힘쓰며 <국가>, <향연>, <파이돈>, <파이드로스> 등의 저술 활동을 펼쳤다.
아카데메이아 학원은 유명해지면서 529년까지 명맥이 유지되었다. 현재 사용되는 '아카데미(Academy)'라는 말은 여기서 유래되었다. 후에 디오뉘시오스의 부탁을 받고 다시 이상 국가를 펼치기 위해 노력했으나 실패하고 오직 저술 활동에만 전념하던 중 81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이했다. 그는 개인의 확대로 나타난 것이 '국가'라고 봤으며, '지혜'를 가진 통치자 계급과 '용기'를 가진 방위계급(군인), '절제'하는 생산자 계급(상민)들이 모두 타고난 기질을 알고 거기에 대한 역할을 할 때 '정의'가 실현된다고 보았다. 이것을 4주덕이라고 하는데, 4주덕에 맞는 각각의 신분이 각자 맡은 일을 해야만 그것이 조화를 이룬다고 보았다.
서로 맞지 않는 일을 하거나 상민이 전쟁을 하는 등의 행동은 플라톤의 관점에서는 사회적 혼란을 불러온다고 판단했다. 플라톤은 여기서 선의 이데아를 통해 "철학자가 왕이 되거나, 왕이 철학을 해야 한다"는 철인정치를 주장하였다. 이를 통해 플라톤이 신분사회를 옹호한 것을 알 수 있는데, 그가 주장했던 신분사회의 왕은 도덕적 책무를 지닌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표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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