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에트 연방(구소련) 스타브로폴 지방의 프리블례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1950년 모스크바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하였으며, 1952년 공산당에 입당하여 교내의 콤소몰(공산주의청년동맹) 조직원으로 활약하였다. 5년간의 대학과정을 마치고 1955년 고향 스타브로폴로 돌아와 콤소몰 서기로 일하다가, 1968년 지구당 제1서기를 거쳤으며 1971년 소련공산당 중앙위원이 되었다. 1978년 농업담당 당서기로 취임하여 대규모 농업투자정책을 수행하였다. 1980년에는 정치국원으로 선출되어 권력의 핵심권에 접근, 제2인자의 위치를 굳혔다.

1985년 3월 체르넨코가 사망하면서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 서기장에 선출되었고, 페레스트로이카(개혁)를 추진하여 소련 국내에서의 개혁과 개방뿐만 아니라, 동유럽의 민주화 개혁 등 세계 질서에도 큰 변혁을 일으켰다. 이어 소비에트 연방의 국무총리와 국가 수반을 겸임하였다. 집권 이후 공산주의 경제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 시장경제를 받아들였고, 모스크바에 최초의 시장을 세우기도 하였다. 또한 언론의 자유를 주장하면서 고르바초프 집권 이후 텔레비전 방송에는 민주주의 국가의 영화가 방영되기도 하였으며, 공산주의나 소련 공산당에 대한 비판도 허용되었다. 여기에 정치적 목적이긴 했으나 교회의 종교 활동을 허용했다.

1988년 연방최고회의 간부회의장을 겸하고, 1990년 3월 총리직에서 물러났으나 소련 최초의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그리고 1991년 7월 마르크스-레닌주의 및 계급투쟁 포기의 소련공산당 새 강령을 마련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개혁 의지는 보수 강경파들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으며, 결국 그들은 고르바초프를 실각시키고 구체제로 환원하려는 목적 아래 1991년 8월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러나 옐친을 비롯한 급진 개혁파들과 민중의 저항으로 이들의 쿠데타는 3일만에 실패했으며, 고르바초프는 복권되었다.

이후 고르바초프는 공산당을 해체하였고, 이로 인해 70년간의 공산 통치는 막을 내리게 된다. 그러나 옐친 등의 주도로 1991년 12월 벨라베자 조약에 의해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고 독립국연합이 탄생하자 12월 25일 대통령직을 사임하였다. 1990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으며, 1994년 사회·정치연구소의 의장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러시아의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도 하였으며, 2008년 9월 30일에는 정당 창당을 발표함으로써 17년 만에 정계에 복귀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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