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전쟁에서 승리한 쪽은?
1860년의 대통령선거는 남부의 운명을 건 중대사였다. 링컨의 대통령 당선은 노예제도에 반대하는 북부와 공화당의 승리이며, 남부가 우세할 수 있는 기회를 영원히 상실한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따라서 이를 계기로 남부의 7개주(앨라배마·플로리다·조지아·루이지애나·미시시피·사우스캐롤라이나·텍사스)는 연방으로부터 이탈할 결의를 굳힌 가운데, 1861년 2월 미국남부연합을 조직하였다. 이에 대하여 링컨은 어느 주도 연방으로부터 분리·탈퇴할 권리는 없다고 하여 남부 7개주의 이탈을 인정하지 않았다. 1861년 초에 남부와 북부의 정신적 분리상태는 이미 심각할 대로 심각해졌다.
남북전쟁이 시작될 무렵 북군의 해군력은 분산된 40척의 목조 전함뿐이었으나, 북부의 공업력과 기술은 해군력의 강화와 재편성을 신속히 수행할 수 있게 하여, 1863년까지는 링컨의 남부 해안봉쇄포고를 유효하게 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세력을 확보하였다. 1862년 3월 북군의 장갑함 모니터호(號)는 남군이 자랑하는 장갑함 메리맥호와 접전함으로써 남북전쟁 중 최초의 대해전(大海戰)을 전개하였다. 이 싸움은 철제전함의 위력을 처음으로 선보인 해전으로서도 주목되었다. 이어서 북군은 남부의 가장 중요한 항구인 뉴올리언스를 해상으로부터 공략하여 서부전선을 지원하였다. 그리고 1864년 8월의 모빌항(港) 대해전은 북군의 해상봉쇄를 완벽하게 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남부는 목화의 대(對)유럽 수출과 탄약·의류·의약품 등의 수입을 방해받게 되자 경제적·군사적으로 궁지에 빠지게 되었다.
1864년 5월 북군은 새 총사령관 그랜트 장군의 지휘 아래 대공세를 개시하였다. 서부전선에서는 셔먼 장군 지휘하의 북군이 채터누가에서 애틀랜타로 전진하여 포위작전과 우회작전을 전개하면서 시내로 통하는 철도선로를 확보하여, 열세에 몰린 남군을 후퇴시키고 9월 3일 애틀랜타를 점령하였다. 이어 11월 대서양을 향하여 애틀랜타에서 다시 진격을 개시한 셔먼 장군 휘하의 부대는 12월 20일 마침내 해안도시 서배너를 함락시켰다. 이것이 이른바 셔먼 장군의 ‘대행진’이라는 작전이다. 또한 셔먼은 여기에서 북상하여 그랜트의 공세를 돕게 된다. 동부전선에서는 그랜트가 남군의 주력인 리 지휘하의 노스버지니아 군단을 섬멸하기 위한 공세를 개시하였다. 5월 5일의 윌더니스전투로 시작하여 약 1개월간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전투를 계속한 끝에 피터즈버그에 포진한 남군을 포위한 지 9개월만인 1865년 4월 그랜트는 마침내 남군전선을 돌파하는 한편 파이브폭스에서의 측면공략에도 성공하였다. 전사자와 도망병 때문에 2만 5000명으로 약화된 노스버지니아 군단이 서쪽으로의 퇴로마저 차단되자 리는 더 이상의 저항이 부질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최후의 책임을 완수하기 위해 항복하기로 결심한 리는 그랜트에게 편지를 보내어 회견을 요청하였다. 4월 9일 애퍼매턱스 코트하우스에서 양군의 최고사령관인 그랜트와 리의 회견이 이루어져, 4월 12일 남군의 항복이 정식으로 인정됨으로써 전쟁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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