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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레사 수녀와 관련 있는 인도의 도시는 어디일까요?
테레사 수녀는 1931년부터 1947년까지 인도의 콜카타에 있는 성 마리아 수녀원의 부속 학교에서 소녀들에게 지리학을 가르쳤다. 그녀는 성실히 학생을 가르쳤고 16년 동안 교사 생활을 하면서 교장으로까지 승진했다. 그러던 그녀는 1946년 콜카타에서 다즐링으로 피정을 가던 기차 안에서 신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그것은 그녀가 안온한 로레타 수녀회에서 나가 거리에서 고통 받는 인도의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테레사 수녀가 인도의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기 위해 홀로 콜카타의 빈민 거리로 나선 1940년대 후반 인도는 복잡한 상황을 맞고 있었다. 2차 대전 이후 마침내 200여 년간의 영국 지배를 벗어난 인도는 독립의 기쁨을 누리기도 잠시, 종교적, 정치적인 상황이 맞물려 여러 곳에서 전쟁과 투쟁이 벌어지고 사람들은 서로를 질시하고 반목했다. 대부분 힌두교를 믿는 인도인들은 테레사 수녀의 봉사의 손길을 선교의 뜻으로 오해하고 적대시하였다. 그러나 수녀회를 벗어나 홀로 인도 사람들 앞에 나선 테레사 수녀에게는 이미 오래전에 품었던 선교의 뜻 같은 것은 없었다. 그녀는 오로지 신의 부르심을 실천하며 가난하고 병들어 죽어가는 불쌍한 사람들에게 안식과 위안을 나누어주는 것을 목표로 삼았을 뿐이었다. 테레사 수녀는 인도 사람들에게 자신의 뜻을 알리기 위해 검은 수녀복을 벗고 인도의 흰색 사리를 입었다. 흰색 사리는 인도의 여인 중 가장 가난하고 미천한 여인들이 입는 옷이었는데, 이 옷은 훗날 테레사 수녀를 상징하는 옷이 되기도 하였다. 또한, 테레사 수녀는 자신이 특정 국가나 특정 종교를 홍보하기 위해 나온 사람이 아님을 알리기 위해 인도의 국적을 취득해 인도인이 되었다.
테레사 수녀는 1979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는데 시상식에도 평소와 같이 흰색 사리와 늘 신는 샌들 차림이었다. 그녀는 상금을 받으면서 ‘이 돈으로 빵을 몇 개 살 수 있을까요?’라고 했다. 그녀는 이 상금을 콜카타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모두 썼고 시상식 만찬을 거부하고 그 비용으로 가난한 사람을 도와 달라고 부탁했다. 또한 ‘세계 평화를 위해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란 기자의 질문에는 "집에 돌아가 가족을 사랑해주세요."라고 말했다.
1997년 테레사 수녀의 임종은 그녀의 보살핌을 받던 인도 콜카타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많은 세계인들의 마음을 울렸다. 세계인들은 그녀를 진심으로 애도하였다. 그것은 테레사 수녀의 삶 자체가 보여준 희망, 인간에게 반드시 있으리라 믿어지는 또 다른 한 면, 숭고함이 저물어 가는 데 대한 애도였다. 테레사 수녀의 장례는 인도의 국장으로 치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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