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라리 로고의 기원은 무엇입니까?
1929년 설립된 레이싱 팀 스쿠데리아 페라리는 본래 모데나 시에 위치하여 아마추어 레이서들에게 알파로메오의 차량들을 스폰서 해주던 단체였다. 이 단체의 설립자인 엔초 페라리는 그 스스로도 카 레이서였으며 알파로메오에서 근무하며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아 나가고 있었다. 그 후, 1938년 페라리는 알파 로메오 모터스포츠부의 수장으로 불려가게 된다. 그 후 1939년, 페라리는 알파 로메오의 스폰서쉽과 품질에 대해 갈등을 빚다 알파 로메오를 떠나게 된다. 이 때, 알파 로메오는 페라리에게 그 자신의 이름을 건 회사를 4년간 낼 수 없도록 훼방을 놓는다. 영 좋지 않은 마지막 때문인지 그 동안은 자동차를 직접 개발하는 것에 관심이 없던 페라리는 언젠가 알파 로메오보다 훨씬 인정받는 자동차를 만들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알파로메오 덕분에 페라리가 나왔고, 페라리 덕분에 람보르기니가 나왔고, 람보르기니 덕분에 파가니가 나온셈. 이후 그는 자신이 직접 레이스카를 만들기 위해 1939년 모데나에 Auto Avio Construzioni를 설립한다. 이 때 815를 만들었으며 1940년 밀레 말리아 레이스 외 13개의 레이스에 참가하여 6번의 우승을 일궈낸다. 그러나 베니토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권이 2차대전에 참전하면서 자동차 경주는 금지되었으며. 모데나의 페라리 공장은 무솔리니의 지배하에 놓이면서 군수물자를 생산하게 된다. 그러는 도중 폭격을 맞아 페라리는 지금의 마라넬로 시로 옮겨가게 된다. 전쟁이 끝나고 알파 로메오의 영향에서 벗어나게 된 1947년 엔초는 마라넬로에 Ferrari S.p.A를 창립하며 본격적으로 레이스카를 직접 제조하는 기업화된 레이싱팀으로 변모하게 된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레이싱 자금을 조달하기 어려워져 도로 주행이 가능한 166 Inter를 1949년 출시하게 된다. 사실 엔초 페라리는 일반 도로주행용 자동차 생산에 회의적이었으나, 이 때부터 기술력을 과시하기 위해 레이스에 출전하는 완성차 업체가 아닌 경주에 나갈 돈을 벌기 위해 자동차를 생산하는 기업으로서의 역사가 시작된다.
해설 더 보기:
namu.wi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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